여러분 <행복회로>라는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이는 불행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극복하려고 행복한 상상을 하게 하는 뇌신경회로라는 신조어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회로를 돌린다는 말은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긍정의 최면을 걸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행복회로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 최면에서 풀려나는 순간 밀려오는 허무감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암담한 현실에 직면할 때 그 현실을 이길 수 있는 영적 수단이 있는데, 기도입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기도하러 간 것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22:42). 그러나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올린 기도 끝에 하나님의 뜻이 고난의 잔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잔을 마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기도를 맺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참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22:43).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살려는 예수님의 결단을 보시고 천사를 보내어 돕고 계신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능력을 힘입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자기부인’입니다. 신자의 자기부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이는 그것이 신자의 삶에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을 마련해 드리는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고 계셨습니다. 그때 가롯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예수를 팔기로 거래를 마친 후에 그들이 붙여준 하속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양, 천연덕스럽게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와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라, 누가 예수인지 알려주려고 한 신호였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그 사실을 알고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으로 유다에게 물었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22:48). 유다는 이 질문을 예수께서 자신을 돌아서게 하려고 주신 마지막 기회로 삼아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사단의 지배를 받고 주님의 은혜 밖에 있었기에 끝까지 돌아서지 않고 주님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드나요? ‘사람의 일’이 생각을 지배하면 누구나 이렇게 됩니다.
성지에 가면 광야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 있습니다. 가시떨기입니다. 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는 그 곳에 가시떨기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이 식물의 가시는 원래 넓은 잎사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랜 가뭄과 태양 볕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가시로 변화 된 것입니다. 원래 넓은 잎사귀로 그늘을 드리워 주었을 것들이 물이 마르는 환경에서 가시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령에 은혜의 강이 흐르면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쉼을 주는 그늘처럼 풍성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메말라 삭막하게 되면 그의 말과 행동은 가시처럼 섬뜩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메마르게 되는 것은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재앙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입 맞추는 유다의 가증스런 행동이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능력이 있었지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능력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고난의 잔을 앞에 두고 진지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뜻에 철저히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되니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었고 원수까지도 용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