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사람의 차이는 어떤 점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감사생활과 관련해 이렇게 구분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미숙한 사람은 그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성숙한 사람은 작은 은혜에도 감사할 줄 알지만, 미숙한 사람은 큰 은혜에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400년이 넘는 오랜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유케 하신 큰 은혜를 망각한 채, 광야생활 오십여 일간의 작은 불편함에 큰 불평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기만 하려는 사람은 뭘 해줘도 고마운 줄 모르고 한 번 안 해 주면 불만은 또 그렇게 많은 듯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이런 억지에 대해 책망하기 전에 그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주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출16:12). 여기 하나님이 아침에 떡으로 배부르게 해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건 ‘만나’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이 초자연적인 역사를 이루실 때 그 백성이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정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출16:16). 이 명령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매일 만나기 원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매일 한 오멜씩만 거두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매일 만나서 그 은혜 안에 살므로 길을 잃지 않고 가나안에 이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기독교의 독특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은혜이며, 앞으로도 살아갈 날에도 은혜는 필요한데, 호세아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받은 결과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호14:5-7).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에 많이 받고 오래 끊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받고 살아야 합니다. 소낙비는 가끔 시원하게 임하나 우리 영혼이 성장하는 것은 이슬 같은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루 분의 양식만을 거두게 하신 이유는 바로 이 은혜를 매일 맛보라는 뜻입니다. 이슬은 비같이 소리 내며 볼 수 있게 내리지 않습니다. 새벽에 은밀하게 소리 없이 내립니다. 이 말은 은혜를 받는데 소낙비를 맞을 때처럼 특별한 느낌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슬은 빗물 같이 많은 양도 아닙니다. 그래서 느낌이 팍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백합화 같이 향기를 드러내고 백향목 같이 사방으로 그 영향력이 미치는 재목으로 세워져서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