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같이…”
성경은 세상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그들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이와 관련해서 레바논 계 미국 시인, 칼릴 지부란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들의 아이들은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열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과 딸들이다. 그들이 비록 그대들을 통해 태어났지만 그대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대들과 함께 지낸다 하여도 그대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그대의 사랑을 주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는 말라.”
한 번은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들은 그 이전에도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다가 주께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주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그 진지하고 엄숙한 자리에서 다시 그 문제를 들고 나온 겁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 답하시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즉, 천국에서 누가 크냐를 따지기 전에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길부터 바로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야 크든 작든 따져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에 대해 가르치신 것입니다. 먼저, 돌이켜야 하고 그로 인해 어린 아이 같이 되어야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테니 먼저 행할 바를 하라는 뜻입니다.
‘어린이 같다’는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Childish가 아니라 Childlike가 적합할 것입니다. 즉, 어린 아이의 미숙함을 닮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든 저든 이 명령은 당시 유대 문화에서 볼 때 상당히 파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린이를 생각이 옅고 몸도 연약하여 노역이나 전쟁 등에도 별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겨서 사람 수를 셀 때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이를 비유로 제자들의 자리다툼의 행위를 책망한 것이니 도전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런 충격요법까지 쓰시면서 그들에게서 보기 원하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관심이 세상에서 <큰 자 되는 것>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겸손이 그들의 천국입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그들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라 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 그렇다면 어떻게 행하는 것이 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일까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무엇에든 남에게 양보하며 살면 겸손한 사람이 될까요? 말이 많으면 겸손해 보이지 않으니, 한쪽 구석에 가만히 있으면 겸손하다고 할까요? 주께서 말씀하시는 <겸손>은 어린 아이같이 <큰 자가 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서커스 단의 곡예사들은 자기를 잡아주는 이의 손을 붙들어야 비행이 끝날 것을 압니다. 이를 위해 모든 곡예사들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잘 압니다. 그것은 파트너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일과 자신이 붙잡고 있던 것을 미련없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모든 곡예사들은 자신을 ‘잡아 주는 이’에 대해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린이 같이 되라>는 말씀은 이처럼 아이가 부모를 의존하듯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천국 입성의 조건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장 잘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