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앵글리아 러스킨 대학의 심리학과 피터 힐스 교수가 인간관계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일수록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우울한 사람일수록 눈길을 피한다는 것입니다. 눈을 피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행동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가 느끼는 고립감은 커진다고 합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고난당하거나 우울할 때 하나님을 향한 시선도 거두는 이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들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로, 신앙이 아예 없든지 큰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삶이 우울해 죽을 지경에라도 하나님을 향하는 시선만은 결코 거두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할 당시 유대는 극단적인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그로 인해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진노의 심판을 받은 유다 민족의 한 일원으로 예언한 선지자인데, 그는 동족이 포로로 잡혀가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애3:19). 그는 유다 백성이 우상을 숭배한 죄로 인해 당하게 된 그 끔찍한 고난을 ‘쑥과 담즙’에 비유한 것인데, 그렇게 쓰디 쓴 고난을 속에서도 그 민족에게 소망이 있음을 간구한 것입니다. 이처럼 쑥과 담즙 같은 고난을 당할 때라도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렇듯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경우든 주 안에서 ‘희망’을 봅니다.
“Suffering is mandatory. Misery is optional!” 이 말처럼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고난’은 누구에게나 임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으로 인한 ‘고뇌’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이는 그 사람의 비전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여기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일로 고난 받을 수 있으나, 그 때 고뇌에 빠져서 좌절에 가운데 지낼 것인지, 새로운 비전을 품고 솟구쳐 오를 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달린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일어나는 일로 믿게 될 때, 우리도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주권 하에 우리 인생이 만들어져간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예레미야는 유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이해했기에 그 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3:22-23). 그는 고난 중에 고뇌에 빠지지 않았고 주의 자비와 긍휼을 아침마다 노래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매일 아침 주신 만나를 생각나게 하는 표현인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를 지날 때 매일 아침 신선한 만나를 거두었듯이, 고난 중의 그 백성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비와 긍휼을 매일 맛볼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고난 중에 선포하는 이 노래는 ‘미래의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 이어지는 말씀에서처럼 ‘기다림’을 강조합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애3:24-26)
스페인 사람들은“희망은 가장 마지막에 잃는 것이다”라는 경구를 묵상하며 고난을 이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주신 ‘희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가 주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이 ‘희망’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희망을 소유했던 선지자로 그 백성들의 심령에 이 희망을 심어줌으로, 그들도 고난 받는 상황에서 고뇌에만 빠지지 말고 희망을 노래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